“광야에 내몰린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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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순재 작성일2020-08-20 조회수6,519본문
코로나확산으로 공공의 적이 된 한국교회
2020년 1학기가 지루한 듯 길게 지나갔습니다. 연 초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인의 Topic은 코로나 팬데믹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확산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고, 코로나 감염사태가 가져다주는 영향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Post Corona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봇물처럼 열렸는데, 요즘은 “With Corona”로 바꿨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코로나로 인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 혼란을 겪었습니다. 요즘의 우리사회의 형편, 우리나라 경제 상황, 우리기독교의 모습이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먼지 풀풀 나는 광야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광야 길! Off Road Tracking! 도로상황은 엉망인데, 이정표도 없고, 표지판도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교회 활동이 언제 정상화될는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막막한 광야를 걷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며칠 동안 일어난 수도권의 코로나 확산 사건 때문에 한국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공공의 적이 된 느낌입니다. 요즘 그런 인사를 한다고 하잖아요. “목사라서 미안합니다.”, “교회 다녀서 미안합니다.” 한국 기독교 전체가 광야로 내 몰린 느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가게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광야로 내모실까?” 광야를 지나가게 된 이유와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애급에서 탈출한 후 가까운 지름길,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40년을 광야를 지나게 하셨다면, 지났다기보다는 광야를 헤맨 것이죠. 척박한 광야 길에 고난도, 갈등도, 분쟁도 상처도 많았습니다. 전염병과 전쟁도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광야를 지나며 겪은 사건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 미시적 관점, micro-perspective에서 보면 당시 당사자들은 고통스럽고, 힘겹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거시적 관점(Macro-perspective)으로 보면 해석이 달라집니다. 신명기를 기록한 시점, 광야를 통과하고 난 뒤 되돌아보니, 광야길이 하나님이 보호하셨고, 먹여주셨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노예출신 오합지졸 200만 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장대한 아말렉족속과 토착민 블레셋 민족을 만나, 전쟁을 치렀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멸망하고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광야를 거치면서 민족의식도 생기고,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도 알게 되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조직과 군사력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는 과정이며, 시험하셔서 마음이 어떤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문명을 연구하는 미래학자들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현대문명의 발달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 사람들의 기고만장한 마음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광야 길로 들어선 우리 경제, 우리 사회, 우리 교회, 우리 선교대학원이 위기 속에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깊이 성찰하고, 뭐가 문제인지, 무엇이 본질이며 우리 본심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한국교회가 광야로 내몰리는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 광야학교를 잘 통과했는지 못했는지는 1,000년이 훨씬 더 지난 신약시대, 하나님은 성경 사도행전에 순교자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38-42절입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급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제대로 예배드린 적이 있었느냐?’는 말씀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나왔지만, 여전히 애급의 우상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었지만, 노예근성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맘에 들지 않으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거기엔 따끈한 고깃국물이 있다고!”하면서 귀환파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편리하고 쉬운 것만 쫓아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훈련은 전반적으로 볼 때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더 길어졌고,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한다면 우리 광야학교는 고달픈 커리큘럼으로 바뀌고, hard training에, 졸업은 점점 더 뒤로 미뤄질 것입니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수, Minority였습니다. 한번도 30%를 넘어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70%가 크리스천인 것처럼 착각하며 행동했습니다.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일부 교회가 재정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자, 지도자들이 성직자 신분을 망각하고 마치 기업 CEO처럼 행동했습니다. 신학대학들도 일반 대학의 관행과 분위기를 따라 갔습니다. 그러다가 목사님들이, 교수님들이 편리함은 얻었는데, 존경을 상실했습니다. 교회 분쟁 현장에는 대개 지도자의 타락 또는 전횡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광야를 향해 달려 나간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신명기 8장 3-4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에서 떡은 육신에 필요한 것; 이 땅에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공급,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 입을 것, 먹을 것, 머물 곳, 생업, 물질 등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혼과 심령에 필요한 요소를 뜻합니다. 바른 가치관, 신앙, 주를 향한 마음(Heart), 태도. 광야를 지날 때 우리가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먼저인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고, 알려주십니다. 떡이 먼저입니까? 말씀이 먼저입니까? 물질과 소유가 먼저입니까? 신앙과 영원한 가치가 먼저입니까? 코로나로 어려운 지금 이 시기에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JIU도 광야로 내몰린 한국 기독교에 나아갈 방향과 우선순위를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선교의 위기라고 사방에서 이야기하는데, 정작 선교 최고 브레인들이 모인 선교대학원에서 선교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고민이 발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학생들에게도 개인적인 자문과 컨설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는 “광야를 지날 때”입니다. 광야 길은 힘들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준비해 놓으시고, 광야 길 내내 우리 곁에 함께 동행하시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신앙의 본질, 한국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노력합시다.